철학을 하는 시인 이렇게 나는 정리하고자한다.
철학적인 사유로 척학적인 의문으로
시를 형상화 하여 인생 그리고
끝없는 질문 그리고 끝없는 해답을 찾기위해서
시로서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필자는 시에대해서 그렇게 자세히 알고 해석을 할정도의 기질을 가지고 있지않다.
시라고 하는것은 함축적 언어의 표현이기때문에 시를 지은 사람의 생각과
그때당시의 모습을 유추해가면서 시를 알아가야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그렇다. 시라는것이 꼭 그 사람이 지은 느낌과 지은이의
의도된 함축적 표현보다 읽는자의 해석과 읽는자의 느낌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박이문시집중에 가장 유명하고 가장 잘 알려진 시가 '얼어붙은 찰스 강'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인은 찰스강과 세상의 모든것들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는 부동적인 세상을 기리고 있다.
강위로 저녁의 시간을 알리며 더더욱 움직이지 않는 사물적인 세상을 기리고 있다.
단지 홀로 조깅하는 사람 하나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수없다.
세상사 모든것들이 멈춰있지만 조깅을 하는 사람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시인은 그 조깅하는 사람처럼 움직이고 싶어하지 않을까?
모든 멈춰있는 것들에 대한 살아있음을 일깨워 주고 싶어지지는 안았을까?
하지만 입가에 김이 살아있다고만 할뿐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왜 그런것일까?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만족한다는것일까?
아니면 조깅을 하는 사람이 시인이며 홀로 세상을 살아가는것에 대한 비유를 나타낸것일까?

이처럼 많은 의문과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것이 시의 매력이고 시의 힘인거같다.
인생과 세계에 대한 성철의 흔적과 무의미의 세계에 의미를 찾으려하고 존재하는것들에대해
바라보는 시각이 철학적 시각인지 시인으로서의 시각인지 그 해답은 시인도 찾고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시를 시간날때마다 읊어보고 생각날때마다 읊어봤으면 한다.
그때그때마다 달라지며 생각지도 못한 해답을 찾을수 있을것만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headroad
,